윈스턴 처칠은 영국의 제61대, 63대 총리이자 제2차 세계 대전 연합군 승리의 주역이라고 꼽는 인물 중 한 명입니다.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윈스턴 처칠은 은 누구이고 또 그가 생각하는 행복은 무엇이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윈스턴 처칠 그는 누구인가
윈스턴 처칠은 7세대 말버러 공작의 외손자이며, 대정치가 랜돌프 처칠과 재무장관의 딸 제니 제롬의 아들입니다. 윈스턴은 명문가 출신이지만, 아버지는 매독을 이유로 어린 나이에 사망하고 어머니는 사교계에서 인맥을 살려 윈스턴에게 정치적인 스승으로 작용했습니다. 윈스턴 처칠은 후에 영국 정치의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 되었으며,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엄청난 자질을 보여 동맹군을 이끌어 승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의 출신은 명문가이지만, 군중들은 그를 귀족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윈스턴 처칠은 해로우 스쿨과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영국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압박적인 기숙사 생활로 인해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았으며, 학교에서는 계속 낙제생인 존재였습니다. 이후 윈스턴은 군인 및 전쟁 기자로 일하면서, 다양한 전투와 전쟁에 참가했습니다. 그는 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강의 전쟁>이라는 책을 썼으며, 영국 육군이 기관총으로 수단 독립군을 학살한 옴두르만 전투에 대해서 "야만인을 상대로 한 현대문명의 가장 위대한 승리"라고 평했습니다. 또한, 토후국 반군과 싸우면서 어깨관절에 습관성 탈구를 발생하여 기병도를 크게 휘두를 수 없게 되었지만, 개인적으로 마우저 C96 권총을 구매하여 이를 대신 사용하면서 전투에서 살아남은 경험도 있습니다.
윈스턴 처칠은 보어전쟁에서 종군기자 및 장교로 활약하면서, 본국으로의 생생한 전달로 국민적인 영웅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전쟁 도중 보어군에 붙잡히고 탈출하면서도, 자비로 인해 도와준 영국 이주자의 지원을 받았으며, 보어군같이 위장하고 480km를 걸어가며 탈출해 낸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후 군인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전투에서 직접 싸우고 군인 및 종군기자 역할을 동시에 소화하였습니다. 스피온 콥 전투에서는 지휘관과 부적절한 대화를 나누어 악명이 높아졌지만, 이 이외에는 여러 전투에서 용맹스러운 활약을 펼쳤습니다.
윈스턴 처칠은 육군 출신임에도 해군 장관으로 임명되어 1차 세계대전 중 동맹국인 오스만 제국의 전함 2척을 강탈하여 영국 해군에 편입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동맹을 유지하던 오스만 제국은 영국 및 프랑스 해군을 피해 독일 제국 해군의 순양전함을 인도하며, 중립을 버리고 독일의 동맹국으로 참전하게 됩니다. 이 행동은 1차 세계대전의 블랙홀인 중동전선이 만들어지는 것에 영향을 준 것으로, 수많은 피해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1차 세계대전의 여러 전장에서 용맹스러운 활약을 펼치면서 영국 내에서 국민적인 영웅으로 불리게 됩니다. 하지만 갈리폴리 작전에서 큰 실패를 기록하면서 해군장관에서 해임되고 랭커스터 공작령 부 대법관으로 임명되는 등 성공과 실패를 번갈아 경험하였습니다. 이후 군수상과 하원 의원을 거쳐 전근직을 사임하면서 정치의 결을 거듭했습니다. 또한, 육군에서 개발 지원을 받은 MK 시리즈를 지지하였으나 대규모 육상 전함 개발 계획은 거절당하고 전차 개발 계획인 "Tank" 양산에 역점을 두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대륙을 가로지르는 철의 장막이 놓이게 됩니다. 처칠은 철의 장막에 대해 유럽이 분할될 것이라고 경고했으며, 유럽 국가들은 모스크바의 영향력에 쫓겨있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이후 처칠은 철의 장막 연설에서 냉전이 시작될 것이라고 예언하며, 영연방은 미국과의 영구 방위조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연설이 열린 곳은 웨스트민스터 대학이며, 로날드 레이건은 이 자리에서 베를린 장벽 조각으로 만들어진 기념물을 제막하며 이 자리에서 자유 유럽의 길이 시작됐다는 말을 했습니다.
처칠은 이후 영국 총리로 활약하며 냉전, 대영제국 해체 등 많은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치 활동을 계속하며 보수당 내각을 이끌었으며, 노동당 출신의원들에게 내각을 준 것 등 포용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또한 삶의 끝까지 창작 활동도 이어지며, 1953년에는 <제2차 세계 대전사>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대영제국 해체로 인해 어둠이 내려온 것에 대한 한탄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살아있는 가장 위대한 영국인"으로 선정되는 등 대단히 큰 평가를 받았습니다.
윈스턴 처칠이 생각하는 행복이란 무엇일까
처칠은 행복의 정의에 대해 여러 차례 고민하고, 그에 대해서는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과 행동을 살펴보면, 그가 가장 큰 행복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고들 도움을 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대량학살처럼 인류의 고통과 불행에 직면하였지만, 그 이외의 일상에서도 보다 새로운 도전과 성취를 이루는데 열심히 노력하였습니다. 정치인으로서 종종 낙심하고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지만, 그는 삶의 의미를 잃지 않고 전후 여러 시대를 살아온 인간을 이롭게 하는 일을 통해 무언가를 실현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따라서 처칠이 생각하는 행복은 개인적인 쾌감이나 사치적인 욕망을 충족하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도우며 자신의 역량과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윈스턴 처칠의 행복가치관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실천할 수 있을까
처칠이 생각하는 행복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능력과 역량을 최대한 활용하여 다른 사람들을 도우며 보다 큰 성취를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봉사활동에 참여하거나, 자신의 기술이나 경험을 활용하여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일을 하면 됩니다. 또한,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닌, 타인을 위한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도 처칠이 강조한 가치 중 하나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며, 매사에서 조금 더 타인과의 공동체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처칠의 행복을 실천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삶에서 조금 더 타인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자원을 주변에 공유하고, 보다 큰 성취와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치들을 실천하는 것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전체 사회적인 가치를 높일 수 있습니다.
마치며..
오늘 알아본 윈스턴 처칠은 많은 것을 이루었지만 수많은 실패를 거듭한 것도 사실입니다. 아무리 위대하다고 평가받는 위인도 결국은 평범한 사람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실패 없이 내딛는 발걸음은 너무나 가볍고 허무할 수 있습니다. 실패를 통해 땅을 단단하게 다지고 그 위에 정당한 발걸음을 내디뎌야 진정으로 내 것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견고하게 이룬 나의 성취를 남들과 공유하고 내 주변을 돕는 것에 활용한다면 우리는 또 다른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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